리들러 : 히어로와 빌런의 경계를 허물다
<더 배트맨>의 빌런 리들러는 흥미롭게도 히어로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는 배트맨과 똑같이 어둠 속에서 고담의 범죄자와 부패한 권력층을 처벌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다. 영화는 이런 둘의 공통점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배트맨이 폭력과 공포로 범죄자를 억압한다면, 리들러는 수수께끼와 잔인한 살인을 통해 권력의 비리를 폭로한다. 대상과 방법만 다를 뿐, 둘은 고담을 바로잡기 위한 같은 목적을 가진 듯 보인다. 특히 배트맨이 셀리나를 몰래 감시하는 장면이 리들러의 관음적 시선과 겹쳐지면서, 영화는 두 인물의 유사성을 더욱 강조한다. 초능력이 없는 인간적 히어로 배트맨의 현실적인 한계를 그려내며, 악당과 영웅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묘사한 셈이다. 리들러가 제기하는 '거짓 정의'에 대한 질문은 배트맨의 근본적인 정당성을 흔들며 영화의 핵심 갈등으로 떠오른다. 권력층의 부패가 만연한 도시에서, 폭력과 공포를 수단으로 삼는 배트맨의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배트맨을 압박하고 도발하는 리들러의 존재로 인해 관객은 더욱 긴장감을 느끼게 되고, 히어로의 도덕성마저 의심하게 만드는 서술 방식이 돋보인다.
브루스 : 복수심에 사로잡힌 히어로의 초상
이 영화의 배트맨은 기존 시리즈와 달리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의 구분이 거의 없다. 이전 시리즈에서는 배트맨이 아닌 부유한 브루스 웨인의 삶을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했지만, <더 배트맨>에서는 오히려 브루스 웨인의 삶조차 복수와 집착으로 얼룩져 있다. 브루스 웨인이 가면을 벗어도 눈가의 검은 칠을 지우지 않는 디테일은 배트맨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브루스 본인을 집어삼키고 있는지 잘 드러낸다. 브루스는 아버지 토마스 웨인의 과오가 밝혀지면서 정신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그의 정의로운 복수는 부모의 선한 희생을 기반으로 했으나, 아버지가 은밀히 저지른 범죄가 밝혀지며 명분 자체가 흔들린다. 결국 배트맨의 복수는 개인적인 상처에서 비롯된 폭력 행위로 축소되고 만다. 이로 인해 관객은 배트맨을 전적으로 선한 존재로 보기 어렵게 된다. 영화는 브루스 웨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관객이 그의 복잡한 감정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유도하지만, 동시에 그의 복수가 순수한 정의가 아닌 개인적 복수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브루스의 이런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모습은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더욱 현실적이고 입체적으로 만든다.
결말 : 뛰어난 빌드업, 평범한 마무리
영화는 긴 러닝타임 동안 배트맨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흔들며 관객을 몰입시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말에서 급작스럽게 배트맨에게 명분을 되찾아주는 평범한 해법을 선택한다. 리들러는 처음에는 치밀하고 지적인 빌런이었으나, 영화 후반부에 갑자기 도시를 무너뜨리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그동안 쌓아온 철학과 매력을 잃고 만다. 빌런의 개연성 없는 급전개는 영화의 분위기와 캐릭터의 일관성을 망가뜨리고, 팽팽했던 긴장감도 무너뜨린다. 결국 배트맨은 리들러의 몰락을 계기로 손쉽게 영웅성을 회복하고, 복수가 아닌 '희망'을 말하는 전형적인 히어로로 거듭난다. 영화 초반부부터 철저히 배트맨을 어둡고 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온 것과 대비되는 매우 안이한 마무리다. 특히 캐릭터 빌드업에 공을 많이 들인 작품에서 이렇게 허무한 결말은 아쉬움을 배가시킨다. 영화 내내 두드러졌던 배트맨과 리들러 간의 윤리적 긴장감은 허무하게 해소되고, 관객의 기대는 채워지지 않는다. 리들러와의 대립을 보다 치밀하게 마무리했더라면 더욱 뛰어난 작품이 될 수 있었지만, 결국 그저 좋은 작품에서 멈추고 만다. 앞으로 이어질 후속편에서는 배트맨이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캐릭터의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결말에서의 아쉬움을 극복하길 기대해본다.
<더 배트맨>은 확실히 히어로 영화로서 독창적인 시도를 보여줬다. 현실적인 세계관과 깊이 있는 캐릭터 묘사는 높이 평가할 만하며, 특히 빌런과 히어로 간의 경계를 허무는 연출은 인상적이다. 비록 결말에서 다소 미흡한 마무리를 보여주었으나, 새로운 배트맨을 만나고 싶은 팬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더 탄탄한 결말로 찾아오길 기대하며, DC 유니버스가 이 영화를 발판 삼아 다시금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